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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April 25, 2012

Last descendant in Joseon Daehan Empire 大韓帝国 最後の末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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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마지막 후예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bomiy00 | 07.12.05 14:12
답변 1
조회 2,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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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마지막 후예들에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우리 나라에 황태자가 언제 까지 있었나요?

마지막 후예들이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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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대한제국 마지막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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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in332 님의 답변
07.12.05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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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恨, 비극적 生
마지막 황실, 잊혀진 대한제국의 후예들



고종황제와 내각(1900년)

1910년 강제 한일합병과 함께 조선의 '황실'은 '왕실'로 격하되고, 그나마 실권이 전혀 없이 명목상으로만 존재했다. 이후 36년간의 식민통치 시대를 거쳐 해방 이후에도 대한제국의 황실은 거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 채 한국인의 뇌리에서 잊혀져 갔다.



구한말 허물어지는 대한제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

황태자 이은과 대한제국 관리들,
오른쪽 빨간 반원안에 평상복 차림의 고종황제가 보인다.

구한말 허물어지는 대한제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이 한 장의 사진. 합방을 3년 앞둔 1907년 7월 고종황제는 제위를 순종에게 물려주고 태황제로 덕수궁에 거주하게 된다. 이 무렵 매국노 송병준을 비롯한 대한제국 대신들의 기념사진 오른쪽 끝에 반쯤 잘려나간 평상복 차림의 고종황제가 등장한다. 이는 곧 기울어가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는 한 장의 사진이다. 이후 일제의 동양문화협회라는 단체는 1933년 이런 사진을 활용하여 일본국민의 필독서로 유명한 '개국문화80년사'를 편찬하게 된다. 일본 천황의 경우 사진의 직접촬영조차도 금지하던 당시로서는 조선 황제에 대한 모독 행위였다.


시대의 사생아가 된 마지막 황실

황실가족 -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귀비엄씨, 덕혜옹주


2005년 7월20일 인천 국제공항. 도쿄발 비행기에서 한 남자의 시신이 내려졌다. 남자의 시신이 내려졌다. 남자의 이름은 이구. ‘대한제국 마지막 황세손’으로 불리던 이였다. 나흘 전 도쿄 한 호텔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심장마비. 영결식은 7월24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치러졌다. 1907년 그의 아버지 영친왕 이은이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면서 시작된 대한제국 황실의 비극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고종 황제는 9남4녀를 두었지만 대부분 어려서 죽고 3남1녀만이 남았다. 순종 황제(이척), 의친왕 이강, 영친왕 이은, 덕혜옹주가 그들이다. 또 영친왕비 이방자, 이구와 그의 전 부인 줄리아 뮬록, 의친왕의 아들로 황적(皇籍)에 오른 장남 이건과 차남 이우에게도 망국의 황손으로 살아가는 삶이란 풍파의 연속이었다.




왼쪽부터 이구와 줄리아 뮬록 부부, 인터넷에서 ‘얼짱 황손’ 으로
화제를 모은 반일주의자인 이우, 결혼식 직후의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


11살때 이토 히로부미를 따라 일본으로 가야 했던 영친왕 이은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국으로 영구귀국한 것은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1963년. 그러나 그는 이미 실어증에 반신불수 상태였다.

그와 50년을 함께 한 영친왕비 이방자는 일본 황족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한·일 문제를 배경으로 한 파란에 충만된 드라마” 같은 생을 살아야 했고, 누이 덕혜옹주는 망국의 공주라는 혹독한 운명에 휘둘리다 정신분열증을 앓고 삶을 마감해야 했다.



일본으로 떠나는 덕혜옹주(1925년3월28일 촬영)


소박한 서민으로 한국에 정착하고 싶어했던 아들 이구도 몰락한 왕조의 유산에 허우적대야 했다. 또 영친왕비 후보로 간택됐었다는 이유로 평생을 수절해야 했던 민갑완의 삶 또한 시대의 광풍이 한 개인의 삶을 얼마나 생채기 낼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대한제국의 황실 … 우린 뭘 알고 있나

무리의 사람들이 황제와 황태자의 어진영(御眞影)을 불태워 버렸다. 사진 속의 황제는 단발을 했으며 군복을 착용하고 있었고, 따라서 사람들은 사진이 조작된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어진영을 소각한 사람들은 대한제국의 황제가 곤룡포를 벗고 군복을 입었으리라고는, 더욱이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고종황제 (1852 ~ 1919)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구중궁궐에 머물러 있는 황제의 모습을 함경북도 시골 사람들이 대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1909년 6월 26일자 대한매일신보는 이들의 거친 행동을 질타하며 '무엄한 촌맹'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게 100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의 우리 역시 대한제국 황실의 흐름과 삶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 동안 대한제국과 고종에 관한 학문적 연구는 진척을 이뤘지만, 고종 일가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극히 부진했다. 우리는 기껏 TV 드라마 '궁'같은 사극으로 재구성된 이미지나, 부정확한 황실 관련 다큐멘터리에 만족해왔는지도 모른다. 서울대 국문학과 출신의 저술가 정범준(36.관훈클럽 근무)이 쓴 '제국의 후예들'은 무관심 속에 방치됐던 '소문 속의 황실'을 복원해낸 문제작이다.

저자는 딱딱한 학술서가 아닌 평전 형식을 취하며 황실 100년사를 재구성한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해 황실에 관한 수백 권의 문헌과 신문·잡지, 그리고 황실 인물들에 대한 치밀한 인터뷰를 거쳤다. 지난해 7월 ‘대한제국 마지막 황세손’이구의 운구 도착 얘기로 이 책은 시작한다.



제국의 후예들/ 정범준 / 황소자리 펴냄


“그가 일본에서 떠돌다 생을 마쳐야 했던 까닭은 무엇인가”를 묻는 이 책은 100년 전 황실을 우리가 얼마나 몰이해와 편견으로 바라보았는가를 자문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일본이 대한제국의 혈통을 끊기 위해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과 일본의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를 강제결혼 시켰다고 믿거나, 덕혜옹주의 일본인 남편인 소 다케유키가 애꾸눈이었고, 그에게 맞아 유산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라는 게 이 책 주장이다.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겠지만, 이방자의 일본어 평전 『비련의 황태자비 이방자』(1989년 번역본 출간) 등에서 노출돼온 “이방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石女)”라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또 덕혜옹주는 남편 폭행으로 유산하지도 않았다.



영친왕과 방자여사의 결혼식


“(이런) 무수한 비화들은 고종 독살설처럼 제법 근거가 있는 것도 있지만 전혀 사실무근인 것도 적지않다”(175쪽)는 것이다.

이러한 낭설은 나라를 빼앗긴 억울한 감정에서 나온 감상적 민족주의 때문이다. 이 책은 황실에 대한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전부일까? 그건 아니다. 『제국의 후예들』의 매력은 황족 이전에 한 인간의 삶이 어떻게 제국주의 폭력에 억압당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일선융화(日鮮融和)의 목적으로 자행된 황족의 정략결혼, 즉 이은과 이방자, 정신분열증을 알았던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 이건과 마츠다히라 요시코….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조선의 황족을 일본군의 장교로 양성하여 전장 속으로 몰아 넣었던 일제의 이빨 자국을 선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실 제국주의 폭력은 식민지를 살아가야 하는 조선 땅 민중들과 연결돼 있다. 황족의 정략결혼은 1920년대 총독부에서 식민지정책으로 추진한 조선 민중들의 내선결혼(內鮮結婚)과 맥을 같이 한다. 또한 황족들의 참전은 조선 민중들을 전장 속으로 동원하기 위한 일종의 모범 케이스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교단의 교직원까지도 칼을 차게 하고 군모와 군화를 신게하였던 일제의 무단통치


이처럼 황족의 정략결혼과 참전은 식민지 조선을 경영하기 위한 일본의 정책이었던 셈이다. 『제국의 후예들』은 황족과 황실이라는 특수집단의 삶에 주목하고 있지만, 이는 ‘한 몸으로 두 세상을 살아가야만 했던’ 지난날 민중들의 이야기와 겹쳐진다. 그러하기에 이 책은 왕족과 민중이라는 이분법적인 역사 서술을 넘어,‘지금 여기’서 진행 중인 폭력까지 읽어내는 지혜를 보여준다.


(mochi)
however last crown prince of Joseon,이구 李玖 was passed on 16 July 2005 in Japan Tokyo.
prince Yi Wu 이우 李鍝 was killed by atomic bomb in 1945 Hiroshima japan.

why korean people could not remember their royal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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